저항문학 작가 남정현 투쟁기
전후 한국 문학계에 대표적 저항작가(抵抗作家)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남정현 작가가 지난 2020년 12월에 향년 87세로 별세했다. 남정현은 1933년 12월 충남 당진시 정미면 매방리에서 태어났다. 서산농림고등학교를 거쳐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했다. 1958년 단편소설 〈경고구역(警告區域)〉, 1959년 〈굴뚝 밑의 유산〉이 『자유문학』지에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러나 남정현의 작가생활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그는 평생 글을 썼으나 평생 문단의 저항아로 남아있었다. 그가 정의라고 선택한 길을 정치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정의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지필화사건(糞地筆禍事件)으로 곤욕
‘분지필화사건’은 지난 1965년 소설가 남정현이 단편소설 〈분지(糞地)〉로 인해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을 말한다. 남정현은 『현대문학』 1965년 3월호에 소설 〈분지〉를 발표했다. 미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정신착란을 일으켜 사망한 어머니를 둔 주인공 '홍만수'가 여동생의 동거남인 미군의 아내를 겁탈한다는 줄거리이다. 이때 ‘분지’, 즉 '똥의 땅'은 강대국 미국에 의해 자주권을 잃은 대한민국의 현실을 상징한다. 사실적이라기보다는 과장과 희화화 등 우화적인 수법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반미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알아본 북조선에서 이 소설을 조선로동당 기관지 『조국통일』 5월 8일자에 무단 전재했다. 남정현은 이것이 빌미가 되어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시의 중앙정보부는 조사가 시작되자 ‘이 작품을 누가 썼느냐. 그것만 말하면 살아서 나갈 수 있다’고 윽박질렀다. 북에서 누가 써서 그의 이름을 통해 발표했다는 논리였다. 매일 매일의 조사는 〈분지〉라는 작품의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읽어 내려가며 그 하나하나에 혐의를 씌우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그는 7월 7일에 정식으로 구속됐다. ‘사전검열’이라는 서슬 퍼런 제도가 문인들을 가두고 있을 때였지만, 이미 발표된 작품이 사후에 재판정에 서게 된 것은 이 사건이 처음이었다. 이듬해 재판이 시작되자 표현의 자유와 문학의 ‘저항성’을 지켜내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담당검사는 공소장에서 남정현이 〈분지〉라는 작품을 통해 현실을 왜곡하고 빈민대중에게 계급의식, 반정부의식을 선동했으며 반공의식을 해이하게 하고 반미감정을 조성했다고 주장했다.
앞에 나서서 그를 변호하기에는 엄혹한 시대였지만 한승헌 변호사, 안수길 선생, 그의 동갑내기 벗인 이어령 교수 등이 나섰다. 또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에서 갓 교편을 잡은 28세의 청년 백낙청이 『조선일보』에 당국의 처사를 규탄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백낙청은 물론이고 그의 글을 게재한 『조선일보』 관계자까지 끌려가 고초를 겪어야 했을 정도로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용기 있는 결단일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67년 남정현은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막 달리기 시작하려고 출발선에 섰는데 발을 걸어 넘어진 것이다.” 남정현이 스스로 표현했듯이, 이제 막 등단해 문단의 기대를 받던 한 젊은 작가에게 ‘필화사건’은 그 세계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펜이 꺾인 것이다. ‘한번만 더 글을 쓰면 손목을 잘라버리겠다’고 하루도 빠짐없이 윽박지르던 수사관들의 말이 쟁쟁하게 귓가를 맴돌며 그를 괴롭혔다. 또 감히 그의 글을 싣겠다고 나서는 곳도 없었다.
민청학련 · 인혁당재건위 조작사건
억울한 피해자 인권은 어쩔 것인가
남정현에게 또 다시 시련이 닥쳤다. 1974년 민청학련, 인혁당재건위 조작사건이 발생하자 긴급조치 1, 4호 위반 혐의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70년대 들어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자 위기감을 느끼고 유신체제 선포, 긴급조치 발표 등 ‘공포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1974년 1월 8일 내려진 긴급조치 1호는 ‘대한민국의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는 것으로 당시 재야에서 불고 있던 ‘개헌운동’에 대한 정권의 선전포고였다. 이어서 박정희는 학생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소위 ‘민청학련’ 관련자를 처벌하기 위한 ‘긴급조치 4호’를 내렸다. 100여명의 학생들이 구속됐고, 민청학련의 ‘배후조직’으로 조작된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만들어 75년 4월 9일에는 8명의 민주 인사가 ‘선고 20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역사적 비극’을 겪어야 했다.
남정현 또한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돼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다. ‘분지사건’과 더불어 그가 문인 20여명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에 참여했던 일로 인해 ‘미운 털’이 박힌 것이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1971년 4월 19일 학계, 언론계, 법조계, 종교계, 문학계를 망라한 저명인사들이 모여 변호사 이병린, 언론인 천관우, 목사 김재준을 공동대표로 반독재투쟁에 나섰던 조직이다.
당국은 남정현을 포함해 4명을 엮어 ‘조직’을 만들고 싶었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이 잡히지 않자 그를 ‘기소’조차 하지 않은 상태로 모진 고초를 겪게 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7개월을 복역하는 동안 면회 한 번 허용되지 않았다. ‘기소’도 되지 않은 사람에게 ‘형무소살이’를 하게 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지만 당국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을 때였다.
‘남산’의 지하실에 갇혀 지낸 3주 중 첫 번째 주가 지난 어느 날이다. 제대로 누워보지 못한 채 밤낮없이 앉아 있느라 심신이 피로하던 그의 옆에 누군가 털썩 앉았다. 잠깐 쳐다본 그는 깜짝 놀랐다. 동향의 절친한 벗인 황현승(당진시 대호지면 출신)이었다. 서로 알은체를 하면 무조건 ‘조직’으로 엮어대던 터라 모르는 체 하면서도 황현승은 몸이 약한 남정현을 걱정해 “선생 식사해야 하는데 어쩌죠?”라고 다른 쪽을 보며 말하기도 했다. 일주일 쯤 지나자 황현승이 갑자기 사라졌다. 수사관에게 “집에 갔나요?”라고 묻자 “그놈 좀 당했죠”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얘기를 듣자 남정현은 눈물이 났다. 황현승은 그 때 끌려 나가서 82년 3·1절 때 형집행정지로 나오기까지 9년이나 옥살이를 했고, 심지어 옥살이를 하는 동안 아내가 사망한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고 한다.
친구 황현승이 떠나버리자 남정현은 졸도를 했다. 수사관들은 그를 병원으로 옮겼고 회복이 되자 다시 형무소로 보냈다. 그해 8월 15일 영부인이던 육영수가 사망하자 조의를 표하는 뜻에서 긴급조치가 해제됐다. 남정현은 그날 밤 석방됐다. 한밤중에 불려가는 것을 보고 주로 72, 73학번이던 대학생들은 ‘죽으러 간다’는 생각에 위로하고 격려하기도 했다.
상주작가인 나(신동길)는 남정현 작가와 황현승 선생 두 분과는 동향이다. 이 중 황현승 선생과는 운 좋게도 1980~90년대에 한 신문사에 근무하면서 대포도 자주 나누고 주말이면 등산도 같이 다니게 되었다. 그러면서 ‘힘들고 억울했던 과거’를 비교적 소상히 들을 수 있었다.
〈너는 뭐냐〉…한국 사회의 왜곡된 구조를 풍자하다
1965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 〈너는 뭐냐〉는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가치관의 전도 상황을 풍자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주된 초점 화자로 등장하는 남편 ‘관수’는 외국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을 하는데 경제적으로 무능하다. 아내 ‘신옥’은 무역회사의 사장 비서로 일하면서 바깥에서는 독신으로 행세하고, 안에 들어와서는 남편에게 애인을 자랑한다. 그녀는 남편에게 애인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 현대적 자유라 주장한다. 도덕적이고 건전한 관수의 이데올로기는 신옥의 속물적이고 왜곡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번번이 설복 당한다.
남정현은 한 대담에서 〈너는 뭐냐〉의 결말에 등장하는 시위 군중이 4.19 혁명의 분위기를 상징한다고 했다. “너만 살면 제일이냐”, “사람대접을 하라”고 외치는 구호와 “인민을 학대하던 일체의 건물과 일체의 제복이 인민들의 그 피를 토하는 함성과 주먹방망이에 의해서 산산히 부서져 버리는 순간이었다”는 묘사가 여기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결론부분에 전개된 시위현장에서 관수는 뜻밖에도 신옥을 목격한다. 신옥은 애인으로 짐작되는 사람과 함께 고급 승용차에 타고 있었다. 자동차에서 ‘클랙슨’이 울리자 시위 군중이 유리창을 깼고, 차 주인이 ‘패스포드’를 내민다. 권위로 압도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군중이 야유하고 비웃는다. 이번에는 차에서 신옥이 화를 내며 내린다. 군중들은 신옥에게 “너는 뭐냐”라고 꾸짖는다.
관수는 신옥이 ‘현대’를 들이대면서 군중을 휘어잡을 줄 알았지만 그녀의 태도는 예상 밖이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빈다. 관수는 문득 다가온 깨달음에서 쾌감을 얻는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고 “너는 뭐냐”라고 외치며 즐거워한다.
인물 간의 갈등이 의외의 결말에 의해 해소되는 것과 함께 인물의 행동이 과장되고 감정이 과잉되어 있다는 것은 남정현 소설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동안 당해왔던 억눌림을 보복하기 위해 관수가 신옥의 멱살을 잡고 “너는 뭐냐”라고 외치는 행위는 과장되어 보인다. 이런 식의 서사 진행은 연극에서 말하는 과잉 연기와 유사하다. 연극에서 나타났던 과잉 연기(ham acting)는 과장되고 부자연스런 몸짓이었다. 이는 코믹한 요소를 증가시켜 희화화를 하기 위해 고안되었던 방식이었는데 여것에는 작가의 의도가 강하게 개입한다.
〈허허 선생〉 연작 8편에 20년 세월
“진짜 세상” 구현을 위한 자기투쟁
1987년에는 민주화 분위기를 타고 그의 작품 〈분지〉가 20여년 만에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또 1973년에 〈허허 선생 1〉로 시작한 ‘허허선생 시리즈’도 1992년에는 〈허허선생 옷 벗을라〉를 내며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이 시리즈를 마감하기까지 장장 20여년이란 세월이 흐른 셈이다.
〈허허 선생〉 연작은 일제 순사 출신으로 해방 뒤에도 승승장구하는 주인공 ‘허허 선생’을 통해 한국 사회의 왜곡된 구조를 풍자한 작품이다. 남정현 자신에 따르면 ‘허허 선생’은 “역사적으로 수백 년 동안 오로지 일신의 영화만을 탐한 나머지 언제나 침략세력이었던 외세와 늘 한통속이 되어 나라와 민중의 이익을 열심히 짓밟은 지배계층 공통의 반인간적이며 반민족적인 그 못돼먹은 의식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타기할 인물”이라고 지칭한다. 남정현은 그런 ‘허허 선생’같은 사람을 20년간 아주 구체적인 경우를 들어가며 꾸짓어 왔던 것이다.
〈분지〉와 〈허허 선생〉 연작에서 보듯 남정현의 소설은 풍자와 반어의 기법을 통해 강렬한 민족주의 및 반외세 의식을 표현하는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삼는다. 문학평론가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장)은 “남정현 소설은 한 시대의 갈등과 모순을 마치 전자현미경처럼 확대시켜 이를 만화풍으로 소묘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허허 선생’의 아들 ‘허만’처럼 건강한 정신으로 ‘민족적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 산다는 것의 어려움을 남정현은 고아가 되고 싶고, 미아가 되고 싶은 심정이라 표현했다. 광복 되던 날 몽둥이를 들고 쫓아와 불을 질렀던 주민들이 허허 선생의 귀향을 환영하기 위해 피켓을 들고 있었다는 결말에서 우리는 남정현이 대중의 무지에 대한 비판에까지 나아가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허허 선생은 비판의 대상이고, 남정현이 바라보았던 우리 정치ㆍ외교ㆍ문화의 상징이었다.
남정현이 생각한 문학은 권력이 쳐놓은 거대한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이었다. 그는 “이 시대의 진실을 알리는 언어는 일종의 암호가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의 언어를 발견하는 것이 엄혹한 시대, 작가의 임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가짜’가 아닌 ‘진짜 세상’이 오면 언제든지 달려가기 위해 약육강식의 ‘시장원리’가 아니라 ‘인간의 원리’가 통용되는 세상, 그가 그려내려고 했던 ‘성지’는 바로 ‘진짜 세상’ 그 자체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