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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야기

[스토리텔링 9화] 서간문의 정수…“꾸밈이 없다 간결하다” 연암 박지원이 면천군수 시절에 보낸 편지 Ⅰ

작성자한국도량형박물관
등록일21-11-25 08:51
조회수185
1.  잘 빚은 항아리 같은 산문(散文)

  연암 박지원은 한국 문학사상 굴지의 대문호다. 그는 특히 산문을 잘 썼는데, 글솜씨가 워낙 빼어나 그의 산문은 마치 잘 빚은 항아리처럼 물샐틈없이 삼엄한 완정미(完整美)를 보여준다. 그의 글은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반어적이고, 때로는 통렬하고 풍자적이며, 때로는 몹시 처연하고, 때로는 능청스러우면서도 심원하고, 때로는 예리한 통찰력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가득하고, 때로는 논리적이고 심오하며, 때로는 세상의 이치를 다 깨달은 사람의 글인 양 담담하고 명상적이며, 때로는 깊은 연민에 잠겨있고, 때로는 몹시 슬프고 아름답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면모의 기저(基底)에는 세상 안팎에 대한 놀라운 반성(反省)과 자기 응시가 자리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창조적인 형식과 의장(意匠) 속에 깊은 사상을 담지(擔持)해 내고 있으며, 사회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 더 나아가 나라와 백성에 대한 선비로서의 경세적(經世的) 책임감을 간결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2. 짤막한 편지에 나타난 ‘꾸밈없음’의 실체

연암의 서간문은 그의 문집인 《연암집》에도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그것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관찰사에게 올린 편지〉처럼 공식적인 성격을 갖는 서한이고, 다른 하나는 문예성(文藝性)을 십분 고려해서 쓴 서한이다. 후자는 보통 ‘척독(尺牘)’이라고 하는데, 대개 짤막한 형태로, 표현을 한껏 다듬고 문예미를 의식하며 쓴 편지이다.

 하지만 서간첩의 편지들은 문집에 수록된 이 두 가지 중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서간첩의 편지들은 어떤 점에서 문집에 실려 있는 편지들과 구별되는 것일까.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할 수 있다. 하나는 ‘사적인 가족성’이요, 다른 하나는 ‘꾸밈없음’이다. 사적인 가족성은 전적으로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해당하는데, 여기에는 꾸밈없음이 동시에 관철되고 있다. 하지만 꾸밈없음은 사적인 가족성보다 그 범위가 넓으니, 이를테면 일부 우인(友人)들에게 보낸 편지는 사적인 가족성은 없지만 거기에도 꾸밈없음은 나타난다. 아마도 이 편지들이 문집에 수록되지 못한 것은 이 편지들이 갖는 이런 두 가지 속성 때문일 것이다.

  이 서간첩의 편지들은 대부분 연암이 아들에게 보낸 것들인데, 실제로 《연암집》에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단 한 편도 실려 있지 않다. 그 사적 가족성과 꾸밈없음 때문에 문집에 넣기가 적절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제외한 것으로 보인다.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검열이 작용한 것이다.

3. 서간첩에 나타난 편지의 종류

서간첩에는 모두 33편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모두 연암이 다른 사람에게 보낸 것이다. 이 편지들을 수신인, 보낸 시기, 쓴 곳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⑴ 수신인
    큰아들 종의 21통
    작은아들 종채 1통
    아들들 1통
    벗 4통
    기타 1통

  큰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이 처남인 이재성에게 보낸 것이다. 기타 1통은 서령군수에게 보낸 것인데, 이 인물은 연암의 자제 벌 되는 사람이니 꼭 벗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큰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연암이 큰아들에게만 주로 편지를 보내서라기보다는 이 서간첩이 큰아들 집안에 전해지던 것이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즉 큰아들이 받은 편지를 주로 모아 놓았던 게 전해진 데서 연유한다. 작은아들도 따로 편지를 받았을 것이지만 작은아들 집안에서 나온 편지는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⑵ 편지를 보낸 시기
    안의 현감으로 있다가 물러날 때까지의 시기 9통
    안의에서 돌아와 면천 군수로 나가기 전까지의 시기 11통
    면천(현재의 당진시 면천면) 군수로 재직하던 시기 13통

  안의에 있을 때의 편지는 1796년(연암 60세) 정월부터 같은 해 3월에 걸쳐 있다. 연암이 안의 현감을 그만둘 무렵의 편지들이다. 연암이 안의로 간 것은 1792년(연암 56세) 정월인데, 부임한 이후 1795년(연암 59세) 12월까지의 편지는 왠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다음의 편지는 1796년(연암 60세) 4월에서 1797년 6월 사이에 쓰여진 것들이다. 연암은 1796년 겨울 제용감(濟用監) 주부에 임명되었고, 얼마 있다가 의금부 도사로 자리를 옮겼으며, 그 후 다시 경기도 고양군에 있는 경종(景宗)의 능을 관리하는 의릉령(懿陵令)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의 편지들은 퍽 다채로울 뿐 더러 다른 두 시기의 편지들에 비해 좀 더 자유분방함을 보여준다. 벗들에게 보낸 편지 4통도 모두 이 시기의 것이다.

면천 군수 시절의 편지는 1797년(연암 61세) 7월 6일에서 8월 23일 사이에 작성되었다. 연암은 1800년(64세) 8월까지 면천에서 근무했으며, 그 달에 양양 부사로 승진되어 9월에 부임했으나 이듬해 봄에 사직했다. 이후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1805년 10월에 서울 재동(齋洞)의 집에서 하직했다. 유감스럽게도 면천 군수 이후의 편지는 발견된 것이 없다.

  ⑶ 편지를 쓴 곳
    안의 관아 8통
    거창 1통
    계산초당 1통
    의릉 임소(任所) 6통
    연암협 3통
    면천 부임길 3통
    면천 관아 10통
    미상 1통

  대부분의 편지는 근무지에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방 수령으로 있으면서 쓴 편지의 겉봉에는 다른 데서 쓴 편지와는 달리 대개 관인(官印)이 찍혀 있다.

큰아이에게(면천 군수 부임 길에)

  * 연암의 편지 내용을 먼저 소개하고, 주석(註釋)을 통해 그 내용을 심화(深化)합니다.

  부임 길에 오른 후 늦더위가 갈수록 심한데 집안엔 별고 없느냐? 나는 초닷샛날 평택역에서 잘 자고 지금 출발하려고 하는데 다리 붓는 증세는 나아지고 있지만 치질이 몹시 심해 난감하다. 그저께부터 차례로 고을에 들며 경악하고 탄식해 마지않으니 뭔 짓이라고 해야 할지. 비록 지극히 아프고 괴로워 애가 끊어지고 간담이 찢어질 듯하다가 돌연 괜찮아진다고는 하나 이처럼 증세가 심해 정신을 잃을 듯한 상태가 오래간 적은 없거늘 어찌 이 지경에 이를 줄 알았겠니. 몹시 서글플 뿐만 아니라 놀라 탄식하게 된다. 아무래도 필시 험로에 고꾸라질 것 같구나. 좀 더 가면 강에 들 텐데 어쩌면 좋으냐?
  오늘 점심께에 안(安) 사돈댁*에 들러 쌀 반 말과 중로(中路)의 주효(酒肴)를 드릴까 한다. 나머지 자세한 말은 새벽 등불 아래 땀을 훔치느라 다 하지 못한다.
  추신 : 오늘 인신(印信)*이 내려올 게다. 그러므로 신창(新昌)에서 먼저 도임 날짜를 보고할 작정이다. 초엿새라도 괜찮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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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安) 사돈댁 : 큰아들 종의의 첫 아내인 덕수 이씨는 종의가 23세 때인 1788년 역병(疫病)으로 사망했다. 종의는 이후 순흥 안씨와 재혼했다. ‘안 사돈’이란 종의의 장인인 안휘(安彙)를 가리킨다.
  인신(印信) : 고을 원의 관인(官印)을 말한다. 조정에서 뒤따라 내려 보낸다.

  연암은 1797년 7월 초 면천 군수에 임명되어 부임길에 오른다. 임명을 받기 전 연암은 심한 학질을 앓아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그런 터에 부임 길에 치질이 도져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은 듯하다. 그 전의 편지들은 늘 자식을 걱정하고 나무라는 말 일색이었는데 이 편지는 거꾸로 아들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다. 그 말이 무척 애처롭다.

  연암은 면천군수에 임명되자 대궐에 들어가 임금님께 하직인사를 드린 다음, 한양을 출발해 과천을 지나 수원-진위-평택-신창을 거쳐 면천의 임지에 도착하였다. 면천은 당시에는 군(郡)이었지만 현재는 행정구역상 당진시 면천면이다. 이 편지의 겉봉에는 “일행이 무사히 평택 숙소에 도착했으며, 출발할 때 안부 편지를 보낸다”라고 적혀 있다.

 큰아이에게(면천에 도착하여)

  과천(果川) 지나던 때의 소식은 혜중(惠仲)* 한테서 들었을 테지. 일간 무더위가 심한데 집안은 모두 별일 없느냐? 다리 붓는 증세는 다 나았고 먹는 것과 자는 것은 평상시와 같지만 치질이 몹시 심하니 이게 난감한 일이며, 당장 더욱 견디기 어려운 건 입술 아래 턱 위의 벌겋게 부은 부스럼이 짓무른 것이니, 비록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나 괴롭긴 괴롭다.

  내일 아침 부임하기 위하여 성 아래 머물 작정이지만 고을 형편 범백(凡百)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게 없구나. 다만 관아의 문을 여닫을 때 하는 의식(儀式)인 북치고 날라리 부는 일은 안의보다 낫고, 말 엉덩이가 가늘어서 잡히는 건 꼭 서울 역마(驛馬) 같으며, 용자군뢰(勇字軍牢)*는 영남보다 낫다. 아전과 하인배의 면상은 몹시 꾀죄죄하고 초라한데 이는 돈과 재물로 졸지에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그런 걸 테니 우습구나, 우스워.

  수영(水營)*에서 실시하는 수조(水操)*는 다음 달 11일 합조(合操)*를 할 예정이라는데, 병선(兵船)*과 방선(防船)* 두 척에 태울 수군은 그 정원 백여 명에 한참 미달이며, 이밖에 배에 부착해야 할 장비가 기한까지 조달할 가망이 전혀 없구나. 비록 빈 배라고는 하나 물길이 험하고 먼 데다 안흥목(安興項)*을 통과해야 하니 반드시 바람을 잘 살펴야 수군이 집결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지 싶다. 만일 초엿샛날의 점고(點考)에 가지 못한다면 이 일이 비록 아이들 장난 같다고는 하나 군율이 몹시 엄하니 이를 장차 어찌할꼬. 호수(虎鬚)*, 동개(同介)*, 칼, 채찍 등의 물건은, 며칠 후 내가 사람을 보낼 테니, 이 점 유의하여 빌릴 만한 데를 널리 물어봐 두는 게 어떻겠니? 말이 돌아가는 편에 대강 쓴다.

  정사년(1797) 7월 초여드레, 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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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중 : 한석호(한석호, 1750~1808). 개성 사람으로, 박지원의 연암협 은거 시절의 제자.
  용자군뢰 : 등에 ‘勇’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옷을 입은 군뢰. 군뢰는 군영과 관아에 소속되어 죄인을 다스리는 일을 맡았던 군졸이다.
  수영 : 수군절도사가 주재하는 군영이며, 수군의 주진(主鎭)이다. 당시 보령현 서쪽 20리 지점의 오천(鰲川).
  수조 : 수군을 조련하는 일.
  합조 : 여러 부대가 모여서 함께 군사훈련을 하는 일. 오늘날의 ‘합동훈련’.
  병선 : 조선시대 전투 시에 사용되던 소형 전투선.
  방선 : 조선시대 수영에 배속되어 있던 전선(戰船)의 하나. 뱃전에 방패를 설치하였으며, 전선 보다는 작고 병선 보다는 큰데, 수군 60명이 탈 수 있었다.
  안흥목 : 태안반도 남서부에 있는 안흥만을 가리킴.
  호수 : 주립(朱笠, 융복을 입을 때 쓰는 붉은 대갓)의 네 귀에 장식으로 꽂던 흰 빛의 새털.
  동개 : 활과 화살을 꽂아 등에 지게 만든 물건.

아직 부임도 하지 않았지만 다음 달 11일에 있을 수군 합동군사훈련 준비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하다. 이런 걸로 보아 연암의 성격이 상당히 치밀하고 준비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수조(水操)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각 도의 수사(水使)가 주관하는 도(道)수조요, 하나는 통제사·통어사가 주관하는 합조(合操)다. 도수조는 각 도의 수사 예하 진(鎭)·포(浦)의 수졸과 병선을 징발하여 그 도의 앞바다에서 해전에 필요한 제반 훈련을 하는 것이고, 합조는 통제사가 경상·전라·충청의 수군을, 통어사가 경기·황해의 수군을 합동으로 훈련시키는 것이다. 수군 훈련은 보통 봄·가을 두 차례 실시하는데, 한 번은 도조를 하고 다른 한 번은 합조를 한다.

  이 편지의 내용 중에 보이는 “아전과 하인배의 면상은 몹시 꾀죄죄하고 초라한데 이는 돈과 재물로 졸지에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그런 걸 테니 우습구나, 우스워”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암이 일찍이 〈허생전〉에서 말한, ‘재물은 도를 살찌게 할 수 없다’라는 말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서령 군수께

  예산(禮山)과 덕산(德山)* 지경에 이르자 사방의 들판이 아득하고 뭇 산이 멀리 아스라하여 비록 서령(瑞寧)*이 어느 쪽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반백 리 안에 있을 테니 저기 구름이 떠있는 바닷가 물억새 근처에서 만나게 되겠지 하고 생각했더랬습니다. 지나가던 당진(唐津)의 아전이 홀연 그대 편지를 전해 주길래 너무나 기뻐 얼른 열어 봤는데 늦더위에 부모님 뫼시고* 잘 계신다니 몹시 위로되오며 마치 얼굴을 마주 대한 양 싶사외다.

  저는 무더위를 무릅쓰고 역사(歷辭)*하던 중 묵은 병이 갑자기 심해졌으나 눌러 있기가 황송하여 억지로 길에 올랐거늘 학질은 비록 물러갔으나 치질이 한창 심하외다. 게다가 수조(水操)가 임박했으나 그 일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으니, 흡사 쳇바퀴를 쓰고 회오리바람에 춤추는 격이외다. 수군과 노군(櫓軍, 사공)은 그 정원의 반도 채 못 되고 돛이나 삿대 등의 장비는 오래되어 삭은 데다 선실(船室)에는 바닷물과 뻘이 가득한데, 바람을 잘 살펴 바다로 나와야 하므로 기한에 대기가 어려울 듯하니 이를 장차 어쩌면 좋겠습니까? 임금님의 하해 같은 큰 은총을 입어 창졸간에 부임은 합니다만 제 분수를 헤아려 보니 상평(尙平)*처럼 딸아이는 이미 시집을 보냈고 도연명(陶淵明)처럼 집 동산에 소나무와 국화가 심겨져 있거늘 어찌하여 또 이런 노욕을 부린 건지 모르겠사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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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산 : 지금의 예산군 덕산면.
  서령 : 지금의 서산시.
  부모님 뫼시고 : 옛날의 효(孝) 관념에 따라, 수신인의 부모가 생존해 계실 경우 편지에서 의례적으로 쓰는 말.
  역사 : 지방의 수령이 부임하기 전 서울의 각 관아를 돌며 인사를 하는 일.

면천과 인접한 고을인 서산의 군수에게 보낸 편지다. 신창 벌판을 지나 면천으로 향할 즈음 예산과 덕산이 바라보인다. 이 편지는 그 도상(途上)에서 써서 보낸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서산 군수는 김희순(金羲淳, 1757~1821)이었다. 안동 김씨로, 자가 태초(太初)이고 호는 산목(山木)이며, 정조 13년(1789)에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편지 끝에 보이는 ‘상평’이라는 인물은 동한(東漢) 때의 유명한 고사(高士)로, 막내딸을 시집보내고 나서는 평소 자신의 뜻대로 명산에 노닐다 여생을 마쳤다는 사람이다. ‘도연명’은 얼마 안 되는 녹봉 때문에 상관에게 굽실거리는 게 싫어 벼슬을 내던지고는 향리로 돌아와 국화를 심어 놓고 몸소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는 인물이다.

 이 두 인물을 들먹이면서 ‘내가 왜 이런 노역을 부린 건지 모르겠다’고 한 말은, 연암이 여기서 처음 한 말은 아니다. 연암은 〈유배지의 이 감사에게 답한 편지〉에서도 거의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경상도 영해(寧海)에 귀양 가 있던 이서구에게 보낸 이 편지는 1795년 가을이나 겨울에 쓴 걸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두 편지의 시차는 고작 1년 반 정도이다. 연암의 이 말은 그냥 겉치레로 한 말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연암이 부임한 지 얼마 안 있어 감사에게 혐오를 느껴 사직서를 낸 일을 생각한다면 연암이 지방관 벼슬에 그리 연연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따라서 도연명 운운한 이 말은 전적으로 외교적 언사만은 아니며, 그 당시 연암의 심경이 일정부분 담겨져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작은아이에게

  네 이름을 마상(馬上)에서 문득 생각해 봤는데 찐덥잖구나, 찐덥잖아. 이는 박유선(朴諭善)의 아들* 이름으로, 그와 나하고는 좋이 지내는 관계이긴 하나그 생김새가 볼품없어 내가 퍽 싫어하거늘 어째서 이 이름과 똑같은 이름을 하겠니? 이제부턴 종하(宗何)라는 이름으로 쓰는 게 좋겠으며, 자(字)는 ‘가인(可人)’이라 하고, 네 형의 자는 ‘의인(義人)’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오례통고(五禮通考)』*는 반드시 사 놓고 싶지만 지금 힘이 부치니 그 사람이 만약 급하게 돈 쓸 곳이 있다고 하면 6, 7냥을 먼저 주는 게 좋겠다. 그 또한 먼저 이 정도의 돈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창(新昌) 읍에서 안(安) 사돈을 찾아가 뵈었는데 지극히 평범한 선비이자 오활한 한 사람의 노유(老儒)더라. 손주도 아주 닮았는데 몹시 귀엽더구나. 이번 내려오는 길에 병세가 자못 가볍지 않앗더랬는데 마침 두 선비가 나를 부호(扶護)하여 와 지금 무사히 고을원에 부임했으니 천신만고를 모두 견딘 셈이다.

  너희 형제는 생각키지 않고 늘 마음에 잊히지 않는 사람은 효수(孝壽)니 우습구나, 우스워. 넌 모름지기 수양을 잘해 마음이 넓고 뜻이 원대한 사람이 되고, 과거 공부나 하는 쩨쩨한 선비가 되지 말았으면 한다.

  광엽이한테는 아직도 소식이 없니? 괴이한 일이다, 괴이한 일이야. 만약 내게 온 편지가 있거든 잊어버리지 말고 싸서 보내어 궁금한 마음을 깨트리게 해주는 게 어떻겠니? 연갑(硯匣) 속에 든, 성위가 분지(粉紙)*에다 쓴 초서 글씨를 좀 싸서 보냈으면 한다. 이방익(李邦翼)*의 전(傳)을 짓는 건 시급한 일이니 초정(楚亭)과 영재(泠齋)* 두 벗을 찾아가 급히 써 내야 한다는 뜻을 전하는 게 어떻겠니? 이만 줄인다.

  정사년 7월 보름,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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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유선의 아들 : 박종간(朴宗幹)을 말한다. ‘박유선’은 박성원(朴聖源, 1697~1757)을 가리키는바,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의 유선(諭善)으로 세손(훗날의 정조)을 가르쳤다.
  오례통고 : 청나라 건륭 때의 진사(進士)인 진혜전(秦惠田)의 저술로 예(禮)에 관한 책이다.
  분지 : 분주지(粉周紙)라고도 함. 무리풀을 먹이고 다듬어서 빛이 희고 지질이 단단한 두루마리.
  이방익 : 1756~?. 조선 후기의 무신. 충장장(忠壯將)으로 있을 때인 1796년 9월 제주 앞바다에서 뱃놀이를 즐기다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중국의 팽호도·대만·하문·절강·산동·북경·요양을 거쳐 이듬해 윤6월에 서울에 도착했다. 국문으로 「표해가(漂海歌)」를 지었다.
  영재 :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호. 연암의 문하생으로, 규장각 검서관을 지냈다.

  연암의 차남인 종채에게 보낸 편지다. 겉봉에 ‘탁연재(濯硏齋) 사황(飼幌)’이라고 적혀 있는데, ‘탁연재’는 계산초당의 사랑채 이름으로 후일 김옥균이 드나들며 박규수의 지도를 받던 곳이라 한다. ‘사황’은 글을 짓는 휘장이란 뜻이니, 편지에서 수신인 이름 뒤에 붙이는 말인 ‘옥안(玉案)’이니 ‘문궤(文几)’니 하는 표현과 비슷하다.

  종채의 초명은 종간(宗侃)인데 이 이름이 안 좋은 듯하니 다른 이름으로 바꾸라는 말을 하고 있다. 연암은 내친 김에 ‘종하’라고 새 이름까지 지어 주었으나 이 이름은 아마 받아들여지지 않은 듯하고, ‘종채’라는 이름을 새로 사용하게 된 듯하다.

  편지 끝의 ‘이방익의 전’이란 현재 『연암집』에 전하는 「이방익의 일을 적다」(書李邦翼事)라는 글을 말한다. 이방익은 1784년(정조 8)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충장장·전주 중군(全州中軍) 등을 지낸 인물이다. 그가 제주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 끝에 중국을 두루 거쳐서 귀국했는데, 도착한 다음날 정조는 이방익을 궁궐로 불러 지나온 중국의 산천 풍속에 대해 물었으며 이방익은 자세히 말로 아뢰었다. 연암이 면천 군수에 임명된 건 공교롭게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연암이 임금께 하직인사를 하러 대궐에 들어가자 정조는 이방익의 일을 말하면서 “내가 이방익과 나눈 말을 기록한 초고가 그날 입시했던 승지한테 있을 것이다. 그걸 면천에 내려 보내도록 하겠으니 너는 한가할 때 좋은 글을 지어 바치도록 하라”라고 분부하였다. 연암으로서는 큰 숙제를 하나 받아 내려온 셈이다.

  서울이 아닌 면천에서 중국 지리를 자세히 고증하여 글을 쓰기란 퍽 어려운 일이었을 터이다. 참고할 자료도 태부족할 뿐더러 갓 부임해 바쁜 공무의 겨를에 그런 일을 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연암은 박제가와 유득공 두 문하생에게 자세한 고증을 가해 초고를 잡아 보라고 부탁했던 것 같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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