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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야기

[스토리텔링 8화] 진유(眞儒)와 문호(文豪)의 길을 가다

작성자한국도량형박물관
등록일21-11-10 14:28
조회수186
진유(眞儒)와 문호(文豪)의 길을 가다
- 구봉 송익필의 문학과 시세계(詩世界) -

1.  송익필 문학의 시대적 배경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은 자를 운장(雲長), 호를 구봉(龜峯)이라 하였으며,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구봉은 조부 송린(宋璘)이 서자였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과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동서붕당이 일어날 때 이 문제가 다시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결국 나그네 신세로 생을 마치는 곤란을 겪게 되었다. 주로 경기도 파주와 고양에서 활동하다가 말년에는 충청도 당진에 내려와 후학을 양성했다.

구봉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명종과 선조 대에는 조선 성리학이 난숙기(爛熟期)에 접어든 시기로, 퇴계와 율곡 등이 등장하여 ‘주자(朱子)’를 넘어 점차 조선 성리학의 독자성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구봉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등과 함께 성리의 본질을 논의한 학자로서 크게 평가되었으며, 예학(禮學)에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구봉의 학문은 그의 제자인 김장생(1548~1631)에게 전수되었고, 다시 신독재, 김집을 거쳐 조선 후기 우암 송시열에게 이어졌으며, 결국 ‘기호학파’라는 커다란 학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기호학파의 중요한 연원(淵源)으로 구봉이 자리하게 된 것이다.

2. 과거의 포기와 문인의 길

  구봉은 아버지 판관 송사련(宋祀連)과 어머니 연일 정씨 사이의 4남 1녀 중 3남으로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났다. 이미 7세에 시구(詩句)를 지을 정도로 시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려서는 과업(科業: 과거시험 준비)에 힘썼던 것으로 생각된다. 집안이 반듯한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과에 올라 현달(顯達)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봉뿐 아니라 아우인 한필(翰弼)도 뛰어난 문재를 가지고 있었기에 더욱 기대가 컸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여 구봉은 아우와 함께 나란히 향시에 합격하였으며, 이때부터 구봉의 이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구봉과 평생 외우(畏友)로 지내며 학문을 논하고, 안부를 물었던 율곡과 우계와의 인연도 이 시기 즈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율곡과 우계는 모두 경기도 파주에 거주하였으며, 모두 신동으로 소문이 났었던 인물이다. 더구나 나이도 각각 1살의 차이가 있어 구봉은 1534년에, 우계는 1535년에, 율곡은 1536년에 태어났다. 따라서 나이도 비슷하고 거주하는 곳도 같았으며, 환경도 서로 비슷하였다. 이런 공통점 때문에 구봉의 나이 20대 초반부터 이들의 교우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향시에 합격한 이후 25세에 대과에 응시할 때까지 더욱 과업 닦는 일에 매진하였을 것은 자명하다. 구봉은 뛰어난 천품을 바탕으로 시(詩), 부(賦), 책(策) 등 과거에 필요한 시문(詩文)을 난숙하게 지을 수 있도록 수학하였던 것이다. 구봉의 시문의 기초는 이미 이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율곡과 함께 대과에 응시하고자 하였지만 ‘서출’이라는 이유로 시험도 치러보지 못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 친구인 이산해(1539~1609), 조헌(1544~1592), 율곡 등이 정거(停擧: 과거시험 자격요건 제한)를 풀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오로지 대과에 합격함으로써 벼슬과 명예를 얻고 집안도 반듯하게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뜻밖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과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다른 길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구봉의 이름이 드러난 것은 그의 시로 인해서이다. 이미 20대부터 이산해를 비롯해 최경창(1539~1583), 백광훈(1537~1582), 최립(1539~1612), 이순인(1533~1592), 윤탁연(1538~1594), 하응림(1536~1567) 등과 시를 지으며 가깝게 지냈으며, 당시의 사람들이 이들을 가리켜 ‘8문장(八文章)’이라 하였다. 구봉의 오언율시 〈독좌(獨坐)〉를 통해 그의 시격(詩格)을 살펴본다.

  芳草掩閑扉  싱그러운 풀 한가한 사립문 가리고
  出花山漏遲  꽃이 피자 산 속 세월 더디네.
  柳深煙欲滴  버들은 짙푸르러 이내가 방울질 듯하고
  池靜鷺忘飛  못 물이 고요하여 해오라기 날기를 잊었네.
  有恃輕年暮  믿음이 있으니 한 해 저물어도 마음 가볍고
  無爭任彼爲  다툼이 없으니 되어 가는 대로 맡겨두네.
  升沈千古事  명리의 부침은 예전부터 있던 일이니
  春夢自依依  봄 꿈이 절로 늘어지네.

위의 시를 살펴보면, 자연에 대한 표현이 선명하고 생동감이 넘쳐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묘사는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심과 미묘한 변화까지 감지해 낼 수 있는 안목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구봉은 이와 같은 묘사와 구성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구봉은 수련(首聯)부터 대장(對仗)으로 맞추어 넣고 있는데, 그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잘 활용했다고 여겨진다. 율시에서 함련(頷聯)과 경련(頸聯)은 반드시 대장을 이루어야 하며, 일반적으로 선경후정(先景後情)의 구성을 사용한다. 구봉은 수련에서 싱그러운 풀이 돋아나고 사방에 꽃이 피고 있는 계절을 제시하였고, 이어서 함련에서 구체적인 봄날의 경치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시어(詩語)의 선택에 색채를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결국 버드나무의 푸르름과 해오라기의 흰색이 선명하게 대비를 이루었으며, 동시에 상구(上句)와 하구(下句)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구성을 하고 있다.

조선의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명으로 꼽히는 상촌 신흠(申欽, 1566~1628)은 구봉의 시가 성당(盛唐)의 품격을 지니고 있어서 그 울림이 맑다고 하였다. 또한 뜻은 정주(程朱)의 근원에 두었기 때문에 말에 조리가 있다고 하였다. 구봉의 시는 상촌이 언급한 대로 표현이 맑고 화사할 뿐만 아니라, 이치에 있어서도 누구나 수긍할 수 있다. 이러한 구봉의 시는 깊은 성리학적 성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여기에 천부적인 시적 재능과 부단한 노력이 함께 하면서 이룬 결과인 것이다.

3. 고단한 삶을 담담하게 극복하다

구봉에게 있어 대과에 응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그의 삶에 있어 절망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20여 년을 하나의 목표를 위해 전념하였는데, 목표를 이루려는 문턱에서 속수무책으로 포기를 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봉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미 과업을 준비하면서 익혔던 성리서(性理書)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학문에 대한 깊은 호기심과 성실함이 과업을 포기하고 성리학에 몰입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겠다. 그 후 성리(性理)에 관한 모든 서적을 가져다 밤낮으로 읽고 연구하였는데, 이것도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서 자득(自得)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구봉의 수제자격인 사계 김장생(1548~1631)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시는 성정(性情)에 근본하여 감정에 따라 나온 것이기에 선과 악을 감출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 시를 외우고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됨을 모를 수가 있겠는가. 선사(先師)는 평소에 성현의 책을 읽고 정주학(程朱學)을 강설하면서 《소학》으로 스스로의 몸가짐을 단속하였기에, 문장(文章)이란 선사에게 있어서 다만 여사(餘事)일 뿐이다. 그 시를 살펴보면 고상하고 청아하며 간명하고 빼어나 유연(悠然)히 자득함이 모두 학문 속에서 유출된 것이기에, 음풍농월(吟風弄月)이나 하는 자로서는 그 만분의 일조차도 닮을 수 없으니, 참으로 덕을 지닌 자의 말이라 하겠다.”

  이처럼 구봉의 학문이 넓고 깊어지면 질수록 시문도 함께 깊어지게 되었다. 김장생이 언급한 바와 같이 시라는 것은 성정에 근본하여 글로 표출된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닦고 깨달음을 얻어 정신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시문에서도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折竹吟: 꺽인 대나무를 읊다〉

  半夜狂風折竹數叢        한밤 중 광풍에 몇 그루 대나무가 부러지기에
  曉起對竹翻撫躬          새벽에 일어나 대를 보고 자신을 반성하네.
  雖然可折不可凋落同蒲柳  꺾일 수는 있어도 갯버들처럼 잎이 지진 않으리
  歸來高臥一慰一忡忡      돌아와 높이 누워 한편으로 위로하고 한편으로 시름짓네.

이 시는 구봉의 평소 생활과 삶에 대한 자세, 그리고 그의 강한 내면을 나타내고 있다. 구봉은 소소한 일상생활이 모두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위의 시에서도 밤새 휘몰아친 강한 바람으로 인해 꺾인 대나무를 보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고, 이어서 앞으로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다짐하고 있다.

  광풍이 몰아치는 것은 자연의 현상이다. 그 광풍에 강직한 대나무가 꺾이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구봉은 20년 가까이 과거 준비를 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나 잘못이 아닌 뜻밖의 이유로 인해 대나무처럼 무참히 꺾이게 되고 말았다. 이리저리 바람에 휩쓸려 다니다가 잎사귀조차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그래서 구봉은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고자 스스로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다면 결국은 시냇가의 버들과 같은 처지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구봉의 삶은 실제로 여유롭지 않았다. 구봉 또한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강한 자존감으로 시문과 학문으로 승화시켰을 뿐이다.

〈도촌(桃村)에서 늦게 일어나니 유숙했던 객은 이미 가버리고〉

  春鳥催人睡起遲  봄새들이 늦잠 자는 사람 깨우건만
  日高猶未啓山扉  해 높이 솟아도 산촌의 사립문 아직 열지 않았네.
  閑居寂寞休煙火  한적한 거처에는 적막하게 밥 짓는 연기 멎었는데
  慙愧詩仙半夜歸  시선이 한 밤 중에 돌아간 것이 부끄럽기만 하네.

  구봉이 거처하는 곳에 친구가 찾아와 함께 시를 지으며 보내다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친구가 밤이 새기도 전에 돌아간 것이다. 구봉을 찾아온 사람은 아침밥을 지을 처지가 못 되는 구봉의 곤궁한 처지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 때문에 미안해 할 구봉을 생각하여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간 것이다. 구봉도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미안하고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강가 마을에서 유숙하다〉

  過飮村醪臥月明  마을 술 실컷 마시고 밝은 달 아래 누우니
  宿雲飛盡曉江淸  오랜 구름 다 걷히고 새벽 강이 맑은데,
  同行催我早歸去  동행이 나를 재촉해 어서 가자고 하는 건
  恐被主人知姓名  행여 주인이 나의 성명을 알까 두려워서라.

 이 시는 구봉의 나이 53세가 되던 1586년, 정민공 안당(安瑭)의 자손들을 부추겨 일으킨 송사를 당하여 집안의 모든 식솔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 때 동서의 붕당이 심화되면서 평소 외우로 가깝게 지냈던 율곡이 반대파에게 크게 공격을 받게 되었으며, 이를 변호하기 위해 우계가 강하게 비판하였다. 율곡이 죽은 후 그 비난의 화살이 구봉에게 이어졌으며, ‘선생의 조모가 원래는 안씨의 종이었는데, 천적(賤籍)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당 가족을 멸살시킨 것이다’라는 구실을 만들어 송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송사가 일자 구봉의 형제들은 모두 피신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이 시를 지은 것이다.

  기구(起句)에는 구봉의 당시 상황을 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갑자기 쫓기는 몸이 되어 당황스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니 술을 마시는 것으로 달래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참담한 상황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술을 많이 마셔보았으나 밤새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밝은 달이 새벽 강물을 비추는 것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함께 가고 있는 동행은 구봉을 재촉하여 날이 밝기 전에 길을 나서자고 한다. 왜냐하면 집 주인이 그를 날아보면 추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는 곳에서〉

  幾落秦關葉  진관의 낙엽은 몇 번이나 졌으며
  三逢楚水春  초수의 봄은 세 번이나 만났네.
  所居皆樂土  사는 곳은 모두 즐거운 땅이 되니
  何往不安身  어디 간들 편치 않은 곳이 있으랴!
  寄興山河遠  산하가 먼 데에 흥취를 부쳐주고
  無求志願伸  소원이 이루어지길 구하지 않네.
  一瓢眞有樂  한 표주박에도 참된 낙이 있으니
  先聖豈欺人  선성께서 어찌 사람을 속였겠는가?

이 시는 구봉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진려(金進礪)의 도움으로 면천(沔川, 현재의 당진)의 마양촌(馬羊村)에 우거한 1595년 이후의 작품으로 보인다. 수련(首聯)에서부터 정확한 대(對)와 비유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구봉이 즐겨 사용하던 구법(句法)이다. 수련에서 자신이 겪은 몇 번의 유배생활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진관’과 ‘초수’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진관은 북쪽 경계인 희천(熙川) 등으로, 초수는 호남(湖南)으로 유배되었던 것을 말하고 있다.

  10여 년의 세월을 남과 북으로 유배되어 곤란을 겪었지만, 함련(頷聯)에서와 같이 어느 곳에 가더라도 몸과 마음이 편안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이미 외부의 환경이 구봉의 내면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귀영화나 입신양명과 같은 것을 이루려는 욕심은 이미 잊었고, 자연 속에서 지락(至樂)을 찾는 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4. 지락(至樂)과 지족(知足)의 말년

  〈만족과 불만족〉

  - 전략 -
  吾年七十臥窮谷  내 나이 칠십에 궁벽한 골에 누웠으니
  人謂不足吾則足  남들은 부족하다고 하지만 나는 만족하네.
  朝看萬峯生白雲  아침엔 봉우리마다 이는 흰 구름을 보며
  自去自來高致足  마음껏 가고 오는 높은 운치가 풍족하네.
  暮看滄海吐明月  저물면 푸른 바다에 돋는 달을 보면
  浩浩金波眼界足  넓고 넓은 금빛 물결 눈앞에 펼쳐져 족하네.
  春有梅花秋有菊  봄에는 매화 피고 가을에는 국화 피어
  代謝無窮幽興足  끝어피고 지니 그윽한 흥취가 족하네.
  一床經書道味深  책상 위의 경서는 도의 맛이 깊으니
  尙友萬古師友足  만고의 성현을 벗하여 스승과 벗이 족하고
  德比先賢雖不足  덕은 선현에 비해 비록 부족하지만
  白髮滿頭年紀足  흰머리 가득하여 나이는 족하네.
  同吾所樂信有時  나와 함께 즐기는 것은 진실로 때가 있어
  卷藏于身樂已足  몸 속에 갈무리하니 즐거움이 족하네.
  俯仰天地能自在  천지간에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니
  天之待我亦云足  하늘이 나를 대함에도 또한 족하다 하겠네.

  위의 시는 구봉의 여러 작품 중에서 그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첫 구에서 자신의 나이를 70이라고 하였다. 구봉은 1534년에 태어나서 1599년에 졸하였으니 66년을 살았다. 그렇게 본다면 아마도 가장 말년에 지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구봉의 삶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봉은 평생을 끊임없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모든 사건의 발단은 구봉 자신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수 있었다. 그러나 구봉은 이런 불합리한 현실에 매이지 않았다. 세속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다른 곳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자연(自然)과 도학(道學)이었다.

  위 시의 앞부분은 자연에서 얻는 즐거움을, 뒷부분은 도학에서 얻는 즐거움을 서술하고 있다. 이런 즐거움은 세속의 범인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이 주는 즐거움은 아침과 저녁, 구름과 달, 봄과 가을에 끊임없이 피고 꽃 등 모든 순간순간, 세상 곳곳마다 즐거움을 주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와 함께 구 책상 앞에 앉아 성현들을 만나 그들과 시간을 초월하여 서로 도에 대해 토론하고 깨달음을 얻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 만족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자연에서 얻는 즐거움과 성현의 도를 공부하면서 얻는 즐거움을 마음속에 갈무리할 수 있어 또한 만족한다고 하였다. 에게 유독 가혹한 고난을 주었다고 원망할 수도 있는 하늘에 대해서 오히려 공평하였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 또한 만족한다고 하였다.

  구봉은 1599년 8월 8일 면천(현 당진)의 마양촌 우거에서 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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