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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야기

[스토리텔링 6화] 천주교 박해시대…교인 보호에 앞장서다 면천군수 연암 박지원의 ‘백성 사랑하기’

작성자한국도량형박물관
등록일21-10-20 14:25
조회수211
1. 면천군에서 천주교 희생을 막아내다

연암이 면천 군수로 임명될 무렵 서양의 천주교가 8도에 크게 번져 정부의 큰 우환거리였다. 박지원이 부임해보니 고을의 병폐나 백성들이 겪는 어려움은 그다지 다스리기 어려울 것이 없어 보였으나 다만 천주교가 성행하여 물들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 사교를 믿는 것이 적발되면 감영과 병영에서는 즉시 죄를 물어 다스렸는데, 어리석고 무식한 백성들은 절의(節義)를 지키는 것인 양 생각하여 죽을 때까지 불복했으며, 설사 사형에 처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때 연암의 종사관으로 따라 내려간 아들 박종채의 기록은 이렇다. 아버지는 “이는 형벌만을 앞세워서는 안된다.”라고 말씀하시고는, 누가 사학을 믿는다는 보고를 받으면 불러다가 가둔 후 매일 밤 한두 명을 불러내어 반복해서 깨우치도록 하셨다. 말씀하시는 내용은 많을 경우 10여 조목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후회하고 자책하는 것을 본 후에야 비로소 풀어주셨다.”

1797년부터 1799년까지 충청도에서 비교적 광범위한 천주교인에 대한 단속이 시행되었다. 천주교에서는 이를 ‘정사박해(丁巳迫害)’라고 부르는데, 이때 100명이 넘는 신자들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오직 면천군만은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었다. 당시 아버지는 백성들을 깨우치던 여러 조목을 친히 일기에 기록해두셨다.

2. 천주교도 김필군의 자수(自首)

박지원은 서학이 가장 극성을 부렸던 충청도 지역에서 바로 그 시기에 면천 군수를 지냈다. 그는 이곳 면천에 1797년 윤 6월 26일에 부임해서 1800년 8월 18일에 이임했다. 당시 충청 감사 이태영은 천주교도 문제로 골치를 썩었다. 천주교도 검거 실적을 놓고 병영(兵營)과 벌여야 하는 신경전도 피곤했다. 온건한 처리를 주장했던 연암도 이 와중에 끼어 큰 애를 먹었다.

연암이 면천 군수로 내려간 이듬해인 1798년이었다. 범천면(泛川面)에 사는 주민 김필군(金必軍)이 천주교 책자와 성화를 들고 군수 앞에 나타나 자수하였다. 그는 천주교 신자로 수배되자 달아나 겨우내 숨어 있던 자였다. 그가 들고 온 책자는 독실한 신자였던 죽은 아들의 것이었다. 김필군도 도저히 교화가 안 된다고 아전들조차 고개를 저었던 골수 신자였다. 죽은 아들은 어질고 착했다. 과거 공부도 열심히 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읽은 천주교 교리서의 뜻을 친절하게 풀이해 주었다. 그런 아들이 1795년 갑자기 죽었다. 그는 아들의 죽음으로 천주교가 허황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김필군이 가지고 온 책자는 모두 12권으로,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성화 한 폭도 있었다. 이 그림은 아들이 서울에서 산 것이라고 했다. 워낙 정교해서 처음엔 수놓은 것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야 직접 그린 그림인 줄을 깨달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인쇄된 원색의 채색 성화(聖畵)였던 듯하다. 입체적 질감의 서양 그림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수놓은 것인 줄 알았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아들은 이 그림을 구입하는데 200냥이나 되는 거금을 주었다고 했다. 200냥은 그때 돈으로 서울에 엔간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당시 천주교인들에게 이런 서양 성화가 얼마나 귀하게 취급되었는지 실감 나게 해주는 액수다.

3. 김필군의 병영 이첩(兵營移牒)을 방해하다

김필군은 그가 그토록 아꼈던 아들의 귀한 책과 성화를 들고 군수 앞에 제 발로 나타나 ‘이제는 천주를 믿지 않겠다’고 했다. 그의 말은 이랬다. “아들이 죽은 뒤 4년 사이에 이따금 꿈에 보이기는 해도, 천주학의 일로 묻고 답하지는 않더군요. 또한 가서 좋은 곳에 있다고 알려주지도 않아, 살았을 때와 죽고 나서가 판이합니다. 기대하고 바랐던 것이 문득 어그러지니, 이것만 보더라도 절로 알겠습니다. 여러 해 동안 쌓은 공이 과연 어디에 있답니까?”

그는 그리운 아들이 살아 그렇게 열심히 믿었으니, 꿈에라도 자기는 천국에 가 있으니 슬퍼하지 말라고 얘기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주 가끔 꿈에 아버지를 찾아온 아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다지 기뻐 보이지도 않았다. 그토록 재미나게 들려주던 책 이야기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아버지인 그는 절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살았을 때 말씀을 기쁘게 믿어 달게 따른 보람이 없지 않은가? 그렇게 열심히 믿었는데 천국에 갈 수 없다면 천주가 대체 있기나 한 것이냐며 신앙을 완전히 버리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박지원은 그의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던 것 같다. 그가 올린 소지(所志)에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적어주고는, 감옥에 가두는 대신 그저 물러가게 했다. 그가 바친 책은 장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김필군을 불러 직접 불태워 버리게 했다. 하지만 병영에서 갑자기 사람이 내려와 김필군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의 책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고, 애초에 김필군을 자신들이 체포한 것으로 조서를 꾸며 자기의 공으로 하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통에 연암의 입장이 난감해졌다. 병영에서는 군수의 태도를 문제 삼아 충청 감사 이태영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연암은 “태양이 떠오르면 도깨비들이 날뛰지 못하고, 훈풍이 불면 얼음과 눈이 절로 녹듯” 형정(刑政)이 아닌 교화로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는 뜻으로 감사 이태영에게 해명을 겸한 보고서를 올렸다. 그러고는 책을 감사에게 이미 보낸 것으로 처리해서 병영 쪽으로 김필군이 끌려가는 것을 막았다. 연암은 김필군에게 불리하지 않게 하려고 병영과 감사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그들 부자의 신앙생활에 대한 묘사를 되도록 아껴서 썼다.

4. 김필군의 배교(背敎)는 위장이었을 것

연암이 「상순사서(上巡使書)」에서 쓴 김필군의 사연은 뭉클한 감동을 준다. 그렇다면 이때 김필군의 배교는 정말이었을까? 그는 아들을 따라 덩달아 믿었던 단순한 서학꾼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7년 전인 1791년 12월 11일에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이 정조에게 올린 비밀 보고서 별지에도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 별지에는 면천을 비롯해서 충주, 보령, 청주, 청양, 홍주, 예산, 덕산, 천안, 직산 등지에서 검거한 천주교도들의 명단과 그들에게서 압수한 서학책과 성물 등의 물품 목록이 적혀 있다. 그중에서도 면천이 첫머리를 차지한 것을 보면 이곳의 천주교 신자가 인원도 가장 많고, 규모도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진3. 김필군이 살던 면천군 범천면에서 김대건 신부가 태어났고 현재는 그 자리에 ‘솔뫼성지’가 조성되어 있다. ‘당진문학관’의 ‘박지원 사랑방’에 전시중인 그림.

이 명단의 앞쪽에 나오는 강주삼, 황아기, 박일득은 이 지역 천주교 세력의 리더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 바로 이어 김필군의 이름이 나온다. 아들이 과거를 보았다고 했으니, 그는 양반 신분이었다. 그 또한 이 지역의 지도자급 인물이었다. 그의 명단이 앞쪽에 놓인 이유다. 그가 간직했던 성화는 이들이 미사를 볼 때 자랑스레 내걸렸던 물건임에 틀림없다.

이어 나오는 김대윤과 김가상 중 한 사람이 1795년에 죽었다는 그의 아들일 것이다. 나란히 놓인 것으로 보아 김대윤이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김가상은 한 집안 사람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때도 이들은 서학책 21권을 들고 자수해서 관청 뜰에서 직접 불태웠다. 배교(背敎)를 행동으로 드러내는 일종의 퍼포먼스였을 것이다.

당시 21권의 서학책을 들고 자수한 김필군과 김대윤, 김가상 세 사람은 요즘 식으로 말해 1개월 보호 관찰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당시는 ‘진산사건’의 여파로 충청도 일대에 천주교도 검거 선풍이 대대적으로 불어 닥쳤던 때였다. 김필군 부자가 보관하고 있던 서학서가 21책이나 되었다면, 그의 집안이 이 지역 천주교도에게 교리를 가르치던 핵심 수뇌였다는 뜻과 같다. ‘진산사건’은 1791년(정조 15) 박지원이 경상도 안의(安義)의 현감으로 있었을 때 호남 진산(珍山)군에서 양반 천주교 신도들이 부모의 신주를 모두 불살라 버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사건이다.

그랬던 그가 그로부터 무려 7년 뒤인 1798년에 다시 서학서 12책을 들고 군수 박지원 앞에 자수했던 것이다. 이 12책은 앞서 관청 뜰에서 불태웠던 21책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따로 숨겨둔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 사이에 새로 마련한 것이었을까? 어쨌든 김필군의 두 차례 배교는 일단 큰 바람을 피하고 보자는 눈속임용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 후로도 이들 부자는 이 지역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했고, 아들이 죽은 뒤에도 김필군의 신앙 활동은 지속되었다.

5. 천주교를 믿는다고 죽일 일은 아니다

박지원은 「상순사서」에서 김필군 검거 당시의 정황을 자세하게 적었다. 그가 살던 범천면(泛川面)은 오늘날 당진시 우강면이다. 그는 1797년 겨울 천주교도 검거 소식에 도망갔다가, 1798년 9월에 슬며시 돌아왔다. 당시 오가작통(五家作統)에 묶여있던 주민 하나가 연좌를 피하려고 이 사실을 신고했다. 하지만 연암은 그를 즉시 체포하지 않고 그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고는 엉뚱하게 환곡(還穀)을 독촉하는 나졸을 보내 그를 불렀다. 연암은 “그 뜻이 실로 마치 알듯 모르게 하는 가운데, 긴가민가 하는 사이에 있었다(意實在於若知不知之中, 有意無意之間)”고 글에서 썼다. 드러내지 않고 그를 불러 감화시키려 했다는 뜻이다.

사진4.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박지원, 박희병 옮김, 돌베개, 2005, ‘당진문학관’ 소장

달아난 죄를 추궁할 줄 알았는데, 사또가 환곡을 왜 안 갚느냐고 부르자, 김필군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제 발로 천주교 책자 12권과 성화 한 폭을 들고 소지(所志)까지 바치며 자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연암은 그가 어리석고 무식해서 책이 있어도 읽지도 못한다고 말했지만, 그는 글을 모르지 않았다.

연암이 글에서 쓴 것처럼 그는 아들만 믿고 따랐던 어수룩한 신자가 아니었다. 여러 아전들이 병영 하리(下吏)의 추궁에, “이전에 서학을 학습하던 자는 저절로 사라져서 모두 평민이 되었고, 그 가운데 김필군이란 자는 가장 교화시키기가 어려웠는데, 일전에 또 제 발로 와서 책을 바쳤으니, 이제 이곳 경내에는 다시 의심할만한 것이 없소”라고 한 대답에서도 확인된다. ‘가장 교화시키기가 어려웠다(最是難化)’, 즉 그는 이 지역의 지도자급 골수 천주교 신자였다.

천주교 신자들을 처리하는 박지원의 이런 관대한 처리에서 천주교에 대한 그의 태도를 짐작케 된다. 그는 천주교를 믿지 않았고, 거부의 뜻도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죽여 가면서까지 다스릴 문제로는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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