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수몽헌문집』, 예승석의 담백한 행적을 담다
『수몽헌문집(守夢軒文集)』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예승석(芮承錫)의 시가(詩歌)와 산문(散文)을 엮어 사후(死後) 5백년이 지난 1934년에 간행한 시문집(詩文集)이다. 모두 2권 1책으로 석인본이다. 후손인 예대훈(芮大塤)이 편집하여 대전 청농정사(靑農精舍)에서 펴냈다. 권두에 김용덕(金容悳)·이가순(李家淳)의 서문과 5대손 대희(大僖)의 발문을 실었다. 권2에는 이현규(李玄圭)의 후서 등을 덧붙였다. 현재 당진문학관 외에 국립중앙도서관과 국민대 도서관, 성균관대 도서관, 연세대 국학자료실 등에 있다.
권1에 부(賦) 1편, 시 1수, 소(疏) 2편, 훈시(訓示)·기(記)·설(說) 각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소(疏)는 그가 사간원 대사간에 재직할 당시 정치의 부패와 시국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책략을 상소한 것이다. 훈시는 그가 이산현감으로 있을 때 현민의 기강을 진작시키기 위하여 내린 「이산현훈이민서(尼山縣訓吏民書)」이다.
권2는 부록으로 은질연보(恩秩年譜)·가장·묘표·묘지·묘갈명·행장 각 1편, 후서 1편, 시 4수, 건원사실(建院事實)·춘추상향축문(春秋常享祝文)·봉안문·상량문·이건상량문·환안문(還安文)·문과방목·수려사관록(修麗史官錄)·세계원류(世系源流) 각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에 「건원사실」은 그를 봉향하기 위한 청백당(淸白堂)의 약사(略事)를 기록한 것이고, 「수려사관록」은 저자가 춘추관 수찬관으로 있으면서 고려사 편찬에 참여한 사실을 적은 것이다.
2. 예승석은 누구인가
예승석은 1406년(태종 6)에 충청도 면천(현 당진시 면천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주경(周卿), 호는 수몽헌(守夢軒)이다. 할아버지는 예악전(芮樂全)이고, 아버지는 예사문(芮思文)이다. 어머니는 송전(宋腆)의 딸이다.
1441년(세종 23) 식년시에서 진사에 급제하고 1447년(세종 29)에 진사로서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그 뒤 이산현감(尼山縣監)으로 나가 누적된 민폐를 시정하고, 1458년(세조 4)에 좌헌납(左獻納)을 거쳐 1466년에 변정원판결사(辨定院判決事)·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468년에 대사간에 올라 인사체계의 확립, 국방력의 강화, 교육제도의 정비, 조세수납의 공정 등을 건의하다가 세조의 비위에 거슬려 체직되었다.
이듬해에 행대호군(行大護軍)으로 춘추관 수찬관을 겸임하고, 이어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통정품계에 올라 병마·수군절도사를 겸임하여 역승(驛丞)의 우대책을 마련하였다. 1471년(성종 2)에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로서 『세조실록』, 이듬해에 『예종실록』 편찬에 각각 참여하였다. 1473년에 공조참판으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에는 전라도관찰사, 1475년에는 한성부우윤을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3. 시골 의사 최명우 선생의 유품
이 책은 당진의 시골 의사 최명우(崔明宇, 1929~1999) 선생이 갖고 있던 것이다. 최명우 선생은 해방 정국에 의학을 전공하고 한국전쟁이후 작고할 때까지 당진의 정미면의 면소재지에서 ‘천의의원’ 을 열었던 전형적인 시골 의사였다.
최명우 선생은 문학에 관심이 많아 틈틈이 관련 서적을 수집했는데, 근·현대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을 거의 망라할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수몽헌문집(守夢軒文集)』도 이런 과정에서 수집된 것으로 보인다. ‘당진문학관’은 최명우 선생의 아들이 선친의 유품을 정리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이 책과 함께 여러 가지 문학 서적을 기증받게 되었다.
4. 예승석의 군정 폐단에 대한 지적
예승석의 벼슬살이에서 주목할 대목은 역시 사간으로의 활동과 실록의 편찬에 참여한 것을 들 수 있다. 그 중에 예승석이 군정의 폐단을 막고자 의견을 개진하여 세조로부터 좋은 결과를 받아내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세조실록 33권, 세조 10년 7월 27일 무인 1번째 기사. 1464년 명(明) 천순(天順) 8년 예승석 등이 변방의 군사를 부리는 일 등의 폐단에 대해서 아뢰다.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나아갔다. 좌참찬(左參贊) 최항(崔恒)·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양성지(梁誠之)·행상호군(行上護軍) 송처관(宋處寬)·이조 참판(吏曹參判) 홍응(洪應)·형조 참판(刑曹參判) 임원준(任元濬)과 승지(承旨)·입직(入直)한 제장(諸將)·겸사복(兼司僕) 등이 입시(入侍)하니, 술자리를 베풀었다.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예승석(芮承錫) 등 18인이 윤대(輪對)하니, 우승지(右承旨) 이파(李坡)에게 명하여 말할 것을 써서 바치게 하였다. 예승석이 아뢰기를,
"변방(邊方)의 병사(兵使)·수사(水使)·만호(萬戶) 등이 사사로이 군졸(軍卒)을 부리므로, 오로지 적(敵)을 방어하는 데 종사(從事)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예승석을 불러서 물었다. 예승석이 대답하여 아뢰는 것이 상실(詳悉)하니, 임금이 가상(嘉尙)히 여겨 말하기를, "내가 깊이 궁중(宮中)에 있어서 변진(邊鎭)의 폐단 되는 일을 아직 들을 수가 없었는데, 지금 네 말을 들으니, 바야흐로 윤대(輪對)의 유익(有益)함이 증명된 것이다."
하고, 드디어 우승지 이파에게 명하여 여러 사람의 말한 바를 조목(條目)별로 해당 관사(官司)에 내려서 시행하게 하였다.
이번에는 예승석이 『조선왕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한 기록이다. 이 중에서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면 이렇다.
예종실록 8권, 부록 편수관 명단
성화(成化) 6년 경인(庚寅) 2월에 왕의 명을 받아 사고(史庫)에서 사초(史草)를 내었다. 성화 7년 신묘(辛卯) 12월에 《세조실록(世祖實錄)》을 찬술하여 끝을 맺고, 비로소 《예종실록(睿宗實錄)》을 찬술하기 시작하여 성화 8년 임진(壬辰) 5월에 끝냈다.
영관사(領館事) : 영의정 겸 예조판서 신숙주, 상당 부원군 겸 병조판서 한명회
감관사(監館事) : 좌의정 겸 영경연사 최항
지관사(知館事) : 판돈녕부사 겸 지경연사 강희맹, 지중추부사 겸 홍문관 제학 양성지
동지관사(同知館事) : 동지중추부사 정난종, 공조참판 김수령, 의흥위 호군 예승석
수찬관(修撰官) : 예문관 부제학 김지경, 예문관 부제학 유권.
5. 이산현감 시절의 「훈이민서(訓吏民書)」
이산현은 현재의 충남 논산시 노성면과 광석면 일원의 고려·조선시대 고을 이름이다. 동쪽으로 계룡산이 지근거리에 있고 현내에 석성천이 흘러서 예로부터 농경이 번창한 곳이다. 예승석이 이산현의 현감으로 내려간 것은 세조 1년(1455), 과거에 급제한 후 8년이 지난 때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산현에 잔폐가 많아 이를 시정코자 예승석을 내려 보냈다는데, 훈이민서(訓吏民書)에 비쳐보면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이곳은 옛 익주에 속했고 백제 이래 ‘노대’로 불렀다. 백성들도 그때부터 살던 사람들이다. 이산현은 신성한 산이 구릉으로 내려앉아 대대로 (농사 짓고) 살기에 좋았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예(禮)와 악(樂)을 노래하며 즐겁게 살아왔다.
근자에 이르러 사기와 풍속이 땅에 떨어져 지난 5년간 기근에 시달리므로 여러 번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모두 무능하고 무책임하여 백성들이 유령처럼 변하게 되었다. 이에 고을의 첩첩한 우환을 없애려는 성지를 갖고 외람되나 내가 (현감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내가 지식과 재능은 비록 부족하지만 이곳의 슬픔을 자연스레 없앨 것이니 나와 여러분 또 백성들은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이를 뽑는 아픔으로 임하여 부지런히 일하고 마음을 모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 친구들과 우애하며 마을이 모두 화목하여 가난과 어려움을 서로 돕기를 바란다.
관에서도 여러 사람에게 부과되던 조세를 사정에 따라 감면할 것이니 백성들은 이를 헤아려 생활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 준비하여 현재의 어려움을 혁신하도록 하라. 이로써 과거의 그릇됨을 해소하고 뜻을 새롭게 하여 안정을 되찾기 바란다. 이것이야말로 군자의 나라를 만드는 길이 아니겠는가.’
6. 한성부 우윤 예승석의 졸기(卒記)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68권, 성종 7년 6월 8일 기묘 4번째 기사. 1476년 명 성화(成化) 12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예승석(芮承錫)이 졸(卒)하였다. 예승석은 면천인(沔川人)으로, 1447년(세종 29)에 과거(科擧)에 급제해서 중외(中外)의 관직(官職)을 역임(歷任)하여 전라도(全羅道)·강원도(江原道) 두 도의 관찰사(觀察使)가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다. 예승석이 이치(吏治)를 잘하므로, 조정(朝廷)에서 일찍이 잔폐(殘弊)한 이산현(尼山縣)의 〈현감(縣監)으로〉 선임(選任)하였는데, 예승석이 현(縣)에 이르러 폐추(廢墜)된 것을 보수(補修)하여 일으킴으로써 명성(名聲)과 공적(功績)을 얻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