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을 사랑한 연암 박지원
- 면천군수 시기를 중심으로
1. 박지원은 누구인가?
연암 박지원은 조선 후기 소설, 철학, 천문학, 병학, 농학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활동한 북학파의 대표적 학자이다. 자는 중미(仲美), 연암(燕巖)은 호이다. 1737년(영조 13)에 태어나 1805년(순조 5)에 사망하였다.
이덕무·이서구·서상수·유금·유득공 등과 교류했으며, 박제가·이희경 등도 그의 집에 자주 출입했다. 1780년 연행에서 접촉한 청의 문물은 그의 사상체계에 큰 영향을 주어, 인륜 위주의 사고에서 이용후생 위주의 사고로 전환하게 되었다. 귀국 후 저술한 〈열하일기〉는 〈호질〉·〈허생전〉 등의 소설도 들어 있지만, 중국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인상과 조선의 제도·문물에 대한 비판 등을 실은 문명비평서이다.
연암은 1797년에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 1799년에는 1년 전에 정조가 내린 권농정구농서(勸農政求農書)의 하교(下敎)에 따라 〈과농소초 課農小抄〉를 지어 올렸다. 이 책은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농업생산관계를 조정하는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 것으로, 그의 사상의 원숙한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혜전 박종채(朴宗采, 1780년 ~ 1835년 11월 13일)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字)는 사행(士行)이다. 1810년(순조 10년) 증광과 진사시(소과)에 합격했다. 연암 박지원의 아들로서 음서직인 경산 현감에 제수됐다.
대과에 급제는 하지 못했으나 평생 아버지의 유업인 북학 사상을 계승하고 그 저작들을 정리했으며 아버지와의 추억을 담은 글들도 다수 남겼다. 전주 류씨와 사이에 박규수, 박선수 형제를 두었고 장남 박규수가 여러차례 국란을 평정한 공으로 이조참판, 이조판서에 이어 영의정에 추증됐다.
저서로 아버지 박지원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그린 〈과정록〉(過庭錄)이 있으며, 후손에 의해 〈나의 아버지 박지원〉이란 제목으로 정식 출판됐다.
2. 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 ‘박지원’
아들 박종채는 아버지 박지원이 면천 군수로 재직하는 내내 종사관으로 따라가 봉사했다. 박종채는 아버지의 일기를 거의 대신해서 쓸 정도였으므로 이 기록은 사실일 것을 전제한다.
① 어명으로 이방익의 일을 기술하다
정사년(1797) 7월에 면천군수에 임명되자 먼저 대궐에 들어가 임금님을 알현했다. 임금님이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내가 최근에 좋은 글감 하나를 얻었다. 너를 시켜 좋은 글 한 편을 짓게 한 지 오래다.” 그리고는 친히 제주 사람 이방익(李邦翼)이 바다에 표류한 일의 전말을 자세히 들려주셨다.
임금님께서는 “내가 이방익과 나눈 말을 기록한 초고가 그 날 입시했던 승지한테 있을 것이다. 그걸 면천에 내려보내도록 하겠으니 너는 한가할 때 좋은 글을 지어 바치도록 하라” 이렇게 분부하셨다.
아버지는 이방익이 임금님께 아뢴 말을 기록한 초고를 참조하여 조목조목 고증을 가해 「이방익의 일을 기술하다」라는 글 한 편을 지으셨다. 그리고 이 글을 당일 입시했던 승지에게 보내 임금님께 바치게 하였다.
② 면천에서 천주교 피해를 없애다.
이때에 서양의 천주교가 8도에 크게 번져 집집마다 물들어 실로 큰 우환거리였다. 부임해보니 사교(邪敎)가 성행하여 물들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 사교를 믿는 것이 적발되면 감영과 병영에서는 즉시 죄를 물어 다스렸는데, 어리석고 무식한 백성들은 절의(節義)를 지키는 것인 양 생각하여 죽을 때까지 불복했으며, 설사 사형에 처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았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도서출판
돌베개, ‘당진문학관’ 소장
아버지는 “이는 형벌만을 앞세워서는 안된다.”라고 말씀하시고는, 누가 사학을 믿는다는 보고를 받으면 매일 밤 업무를 파한 후 한두 명을 불러다가 반복해서 깨우치셨다. 말씀하시는 내용은 많을 경우 10여 조목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후회하고 자책하는 것을 본 후에야 비로소 풀어주셨다.
그 후 신유년(1801, 순조 1)에 천주교도를 대대적으로 처벌한 일이 있었지만, 오직 면천군만은 아무 일이 없었다. 당시 아버지는 백성들을 깨우치던 여러 조목을 친히 일기에 기록해두셨다.
③ 양제(羊提)의 수문 위치를 바꾸다
면천군 남쪽에 ‘양제’라는 제방이 있었는데, 고을로 흘러드는 물을 가두어 모아두는 곳으로 그 물을 사용하는 농토가 매우 넓었다. 그래서 군민들을 동원해서 매년 둑을 손보앗지만 장마를 겪으면 곧 허물어져 백성들이 피해를 보았다.
아버지는 부임하신 초기에 그곳에 가 이리저리 살펴보신 후 봇물이 터지는 원래의 수로를 막고 따로 제방 왼쪽의 바위가 많은 곳을 뚫어 물을 가두고 내보내는 수문으로 삼게 했다. 이후로 제방이 무너질 염려가 아주 없어졌는데, 백성들이 지금도 이 일을 칭송한다고 한다.
④ ‘건곤일초정’을 세우다
성 동쪽 향교 앞에 버려진 연못이 있었다. 사방 1백 보쯤 됐는데, 황폐해진 지 여러 해 되어 물을 가둘 수 없었다. 아버지는 술과 음식을 마련한 후 백성들을 모집해 연못을 준설하여 도랑물이 그 속으로 흘러들게 만들었다. 이에 물이 가득 고여 넘실거렸으며, 가뭄이 들어도 물이 줄지 않았다.
연못 한가운데에는 돌을 쌓아 작은 섬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6각의 초정(草亭)을 세워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또 부교(浮橋)를 들어올려 작은 배를 띄웠는데 아득하니 은자의 정취가 있었다.
⑤ 농서(農書) 2권을 펴내다
아버지는 옛날 연암골에 들어가셨을 때 농서를 즐겨 읽으셨다. 그래서 이 책 저 책에서 발췌해놓은 종이 쪽지가 상자에 가득했다. 이 해(1799) 정월에 임금님께서 특별히 농업을 권장하여 농서를 구한다는 윤음(綸音)을 내리셨다. 그리하여 관찰사와 수령들로 하여금 저마다 농서를 지어 바치게 했다.
아버지는 마침내 예전에 발췌해놓은 글에 당신의 견해를 덧붙이는 한편, 중국에 가셨을 때 견문한 사실 가운데 우리나라에 시행함직한 것들을 추가해 14권의 책을 엮으셨다. 책 이름을 『과농소초』(課農小抄)라 하고 따로 지은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한 편을 부록으로 붙여 임금님께 올렸다.
이 책에 수록된 내용들은 모두 아버지가 일찍부터 연구하신 바로 우리나라에 한번 시행해봄직하다고 여겼던 것들이다.
아버지께서는 경신년(1800)년 8월에 양양(襄陽) 부사(府使)로 승진되어 면천을 떠나게 되셨다. 면천에서는 3년 1개월을 보내셨다.